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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환경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겪는 무리기에, 누군가의 인격이든 인성이든 그 무언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단 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게 전부는 아닐거라 믿는다. 왜냐면 그렇다고 하기엔 내 가족은 결국 모두 다르다. 나도 그렇고. 사람이 자고로 학습을 하기에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니 당연히 그 학습은 그 사람을 바꿔놓을 수 밖에 없다. 

 

폭력적인 성향을 띄는 가정속에서 자라 그 폭력에 무뎌져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렇지않다. 폭력에 진절머리가 나서 본인을 혐오하기도 하고, 폭력자체에 혐오감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껴 그와 정 반대 성향을 지닌 사람이 되기도한다. 어떻게 이걸 재단할 수 있는가. 일어난 결과와 그걸 받아들이고 해석하는건 개인의 의지와 지식, 경험, 감정에 달렸다. 닮아있지만 근본적으로 똑같을 수는 없다. 

 

 

만약 가정환경이 100% 그 사람의 인격에 영향을 준다면 나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사람이어야한다.

 

5살 차이나는 혈육에게 사소한 일로 장난을 빙자한 구타와 폭력을 꽤 당했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혈육은 중학생이었다. 장난을 치다가도 내가 말을 안들으면 혈육은 나를 때렸고, 초등학교 2학년과 남중생의 힘차이는 확연했다. 혈육은 사춘기가 과하지않을정도로 심했다. 일탈은 없었지만 가족에게 하는 행동을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자기 분에 못이겨 욕을 하면서 집밖에 뛰쳐나가고 모는 상처받고, 내게는 잘하는 듯 하다가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떄려서 말을 듣게 했다.

 

 

나는 어렸을 적에 도벽이 있었다. 대부분은 집에 있는 돈을 훔쳤다. 모가 장롱밑에 숨겨둔 비상금을 빼가고, 부가 잠든 새벽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행동의 시작은 모가 내게 시켰던 일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부는 모에게 제대로 생활비 명목의 돈을 주려고 하지않았고, 결국 모는 내게 직접 부의 가방이나 지갑을 뒤지도록 시켰다. 내게는 화내지 않는 걸 알았기 떄문이다.  잦은 횟수로 그렇게 부의 돈을 모에게 가져다주고 나는 지갑을 뒤지는 일에 그닥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냥 걸리면 그 때 생각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나는 당연하게 모와 부의 돈을 훔쳐썼다. 처음은 겨우 몇백원 혹은 몇천원. 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금액이 부풀어 만원 단위로 돈을 훔쳤다. 걸리지않을리가 없다. 나는 돈을 훔치고 최대한 돈은 빨리 쓰기 위해 용썼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쓸 수 있는거라곤 친구들을 데리고 문구점에서 비싼 필통과 과자, 필기구를 사주는거였다. 돈을 훔친날부터는 항상 집에 늦게 들었다. 어차피 걸릴 거란걸 알았고, 매를 맞고 몇시간동안 혼이 났지만 이 도벽은 3학년, 4학년? 그 즈음까지 고쳐지지않았었다. 그 당시 나와 놀던 친구들은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잘 알았지만 날 말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 돈을 동앗줄이라 불렀고, 다같이 무언가 사고싶거나, 먹고싶을때는 오히려 내게 먼저 오늘은 동앗줄이 없냐 물으며 재촉했다.  어느 날은 다른 친구가 본인의 동앗줄을 털어오기도 했다. 그 친구들은 나의 도벽을 잘알았고, 가끔은 커다란 마트에서 물건 훔치기를 권했다. 친구들은 아이스크림을 훔치고, 비싼 색연필을 훔쳤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친구들은 가끔 자기가 아는 언니가 고데기를 훔치다 걸려 경찰서에 갔다고 웃어재꼈다. 우린 걸린 적 없는데. 비웃은거였다. 

 

 

 

지금 나에겐 도벽이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도벽을 고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이건 잘못된 일이다라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주변 친구는 계속 바뀔 수 밖에 없다. 학교가 달라지고, 반이 달라지고,사는 동네가 달라진다.

 

 

집에서 지독하게 혼이 나도 고쳐지지않던 도벽은 친구들로 인해 고쳐졌다. 환경은 중요하지만 그게 순전히 가정환경으로 쭉 이뤄지지않는다. 사람은 사람한테 배운다고 하지않나.  나는 폭력적이지도 않다. 어릴 적은 화를 낼 때 선풍기를 집어던지곤 했다. 화내는 방법을 그렇게밖에 배우지 못했기때문이다. 커가면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바꿔나가고, 화내는 방법을 배웠다. 누군가에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어꺠너머로 배웠다.

울타리를 가족에게만 두르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자기자신만 울타리에 넣을 수 있고, 누군가는 울타리를 치워내 오고가는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사람은 언제나 똑같지 않다.

 

그런데 나는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쓰곤한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외부가 간섭해서는 사람은 바뀌지않는다. 스스로 생각하고 단정내리지않는 이상 변하지않는다. 직접 겪어보지않는 이상 완전한 공감이 힘들듯이, 모든 사람은 본인의 경험에만 의존하니까. 하지만 최소한의 이입과 대입이 가능한게 인간이라면, 바뀌지않는건 본인이 그렇게 결정했기 떄문이다. 

 

 

생각조차 하려하지않는 건 게으르고 기다려줄 필요가 없다.  알고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그른 방향을 선택한다면 기만이다. 사회에 나온 대부분의 바뀌지않고 고쳐져야할 사람은 기만자다. 

 

 

나 역시 좁은 우물안에 사람이기에 이런 생각은 언제 바뀔지 모른다.  불행을 대물림하는 가정환경을 스스로 끊을 수 없는, 힘이든 의지든 자의로 내기엔 어려운 사람들을 말하는게 아니다.

 

 

 

 

본인의 가정환경을 방패막삼아 본인의 핸동과 판단이 선처되길 바라는 빌어먹을 새끼들과 그건 구분되어야한다.

 

무지함이 게으름과 폭력이라면, 알고있음에도 한 선택은 어떤 의미겠는가.